공포/사건사고

대구 성서초등학생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전말

공포이야기 2020.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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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소년 사건은 대구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으로도 불립니다 대구광역시에 살던 5명의 국민학생(초등학생) 들이 집근처 와룡산에 올라갔다가 실종된 사건 입니다 국내에 손꼽히는 영구 미제 사건이자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현재까지도 왜? 5명의 아이들이 와룡산에 올라가 누가? 어떻게? 암매장을 했는가 안했는가? 사고를 당한것인가 등 그 원인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개구리 소년


사건의 시작


1991년 3월 26일 이 날은 전국 광역시와 기초 자치단체의 지방의원을 뽑는 지방선거날이였습니다

 

대구 달서구 성서에 살던 6명의 아이들은 아침 8시쯤 조호연 군의 집 근처에서 놀고있었습니다 이 아이들의 이름은 우철원, 조호연, 김영규, 박찬인, 김종식, 김태룡이며 나이는 1979년생 ~ 1982년생으로 모두 다 13세 이하였습니다

 

이 아이들은 집 근처에서 놀고 있다가 조호연 군의 집에 세 들어살던 한 청년이 시끄럽다고 핀잔을 주었고 김태룡 군을 제외한 5명의 아이들은 와룡산으로 도룡뇽 알을 주우러 근처 와룡산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김태룡 군을 아침밥을 먹으러 갔고 뒤늦게 와룡산으로 갔지만 친구들과 형들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저녁이 되고 5명의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애타게 찾아나섰지만 찾질 못했고 8시가 다 되어서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경찰에서는 근거없이 5명의 아이들이 가정불화로 가출한거로 판단하고 제일 중요한 골든타임을 놓치게 됩니다

 


5명의 개구리 소년들을 보았다는 목격자들


- 조호연의 형 조문연 군은 자전거를 타고 와룡산 입구에서 5명의 아이들을 만나서 잠시 얘기를 나누다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 와룡산 기슭 마을에 사는 김순남 아주머니가 9시쯤에 일찍 투표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와룡산으로 올라가는 5명의 아이들과 지나쳤다

- 김경열 군과 이태석 군은 12시쯤 같은반 우철원 군과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길래 잠시 마주쳤고 얘기를 나누었다

- 함승훈 군은 이 아이들을 직접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동네 형들과 같이 와룡산 계곡에 갔다 형들과 잠시 떨어져 혼자 와룡산 중턱에 있는 무덤가 근처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산 위쪽에서 10초간격으로 다급한 비명소리를 2차례 들었다

- 김종식 군의 어머니와 김영규 군의 어머니는 함승훈 산쪽에서 비명을 들었다는 시간에 갑자기 가슴이 오그라드는 묘한 위기감을 느꼈다


이렇게 5명의 아이들을 목격했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뚜렷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알려진 계기는 매스컴을 통해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당시 대통령 이였던 노태우의 지시로 수많은 경찰과 군인이 총동원되어서 와룡산 주변과 전국을 다 수색했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을 포기 하지 않았고 과자나 비디오, 전화카드 등에 개구리소년들을 찾는다는 사진과 문구들이 삽입 했지만 장난전화만 올뿐 실마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개구리 소년들 발견되다


그렇게 영영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조차 못찾을지 않았던 이 사건은 2002년 9월 26일 실종 11년만에 5명의 유골을 발견하게 됩니다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라갔던 오우근 씨가 와룡산 중턱에서 5명의 유골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발견 당시 이 아이들의 옷소매가 뒤로 묶여있었고 유골을 부검한 결과 우철원 군의 두개골에 찍힌 상흔만 25군데나 발견되었고 다른 아이들도 있었지만 우철원 군은 유난히 심했습니다
추측으로는 우철원 군이 저항하다가 본보기로 크게 희생된것으로 판단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이해할수 없는 점이 11년이 지나고서야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되었다는점입니다 당시 수많은 경찰과 군인들 그리고 자원 봉사자들이 총 동원되어서 와룡산을 수색했는데 발견하지 못했다는점입니다
이점으로 보아 일각에서는 다른 장소에 끌려가 피살된후 이 사건이 잠잠해질때까지 기다리다가 아이들의 시체를 와룡산에 암매장 했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추측과 음모론이 빗발치기 시작했습니다

 

 

범인추정

 

 

사격장 오발설

 

5명의 아이들이 발견된곳 근처에는 50사단 사격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2년 대구에 살던 구두닦이 분이 30대로 보이는 군인 손님이 개구리소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것을 들었다고 합니다
' 군 복무중에 느닷없이 튀어나논 5명의 아이들을 오발하여 1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를 했고 1명이 부상당하자
나머지 아이들을 다른곳으로 끌고가서 죽이고 은폐했다'는 얘기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50사단에서는 5명의 아이들이 실종된 당일은 사격 일정이 없었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김철규 범인설


실종된 김종식 군의 아버지인 김철규씨가 5명의 아이들을 모두 토막살해를 한뒤 그 집에 암매장했다는 범죄
심리학자 김가원의 주장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김철규씨의 집안 곳곳을 파내고 뜯고 하는 일이 발생했지만 아이들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고
해프닝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가원씨는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와룡산 불량배 살인설

 

어떤 인터넷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익명으로 와룡산 불량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얘기도 나와었습니다

 




개구리소년... 내가 타살로 생각하는이유는?
유골로 돌아온 개구리소년... 우선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아울러 모든국민들이 공감할수있는 수사가 진행되기를 바라면서 내가 타살로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서 몇자 적고자 합니다.

- 타살로 생각하는 이유 -

난 대구시 서구에 위치한 서도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중학교는 당시 50사단(개구리소년의 유해가 발견된곳)과 그리멀지않은 죽전중학교를 졸업했다.
물론 내가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다닐때와는 약간의 세월차는 있다. - 난 30대 초반으로써 84년 중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나도 중학교때까지 와룡산 사격장으로 탄피와 더불어 유탄을 줏으러 다닌경험이 있다.

군부대 관계자들은 부인하겠지만, 당시 근처의(서구평리동일대까지) 초,중학생들중 탄피와 유탄을 줏으러 다녀본 경험이 있는이들은 다 알것이다. 예비군 사격훈련장까지도 들어갈수가 있었다.

거기서 탄피를 줏어오기도 했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에 장담한다.

당시 꽤 먼거리에 총쏘는곳이 있고, 총알이 박히는쪽에는 모래주머니와 더불어 흙으로벽이둘러쳐져 있었다. (참고로 나는 생계곤란으로 방위병훈련소집면제되었다. 태어나서 아직까지 실제총은 한번도 만져보지못한, 그야말로 당시의 기억대로이다.)

모아서 팔기도하고, 목걸이나 기타 장식품을 만들기도 했으며, 자랑삼아 필통에 넣어다니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때에는 이곡동(당시50사단근처)에 친구네 집이 있어서 자주 놀러가서 산새들과 토끼등을 잡겠다고 와룡산에 많이 올랐었다.
지금 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곳. 민가에서 많이 떨어지지 않았던곳으로 기억한다. 그곳에서내려다보면 민가의 불빛이 보였고, 오솔길도 아래쪽으로 나 있던 곳으로 기억한다.

나도 그 근처까지, 아니 더 위쪽으로도 자주 놀러가봤고, 해가지면 내려오곤했었다.

내 기억과 경험으로 비춰봤을때 소년들이 당시 날이 추워서 저체온증에 시달릴정도로 추웠다면 민가의 불빛을보고 내려왔을것이다.

그리고 근처에 살지않는 나도 초등학교때 친구들과 와룡산에 갔을때 해가 지면 민가의 불빛을보고 내려오곤했었는데 하물며 인근에 살면서 와룡산에 자주 오르락거렸던 소년들이 내려오지못하고 사고를 당했다는건 상식적으로도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난 그 소년들이 다른곳에서 피살되어서 옮겨졌다기보다는 그곳에서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물론 내 경험에 비추어봐서 추론해 본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도 어릴때 와룡산에 자주 오르곤했다.

그러나 늘 재미나는 산행(놀이)만은 아니었다. 가끔은 정말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와룡산은 그리 높지않은 야산형태이면서 깊숙히 들어가면 어느정도 숲이 형성되기때문에 불량한 이들이 꽤 많이 있었다.

어릴적 당시에 술에취한 고등학생이나 20대초반정도의 형들이 싸우는것도 자주 목격을 했었고, 심지어는 은밀한 행각도 많이 보아왔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끔씩은 그들의 노리개감이 되곤했었다.

술에취한채 담배를 물고 나타나서는 우리가 줏어놓은 탄피와 탄두를 모조리 뺏고, 때리기도 했으며 업드려뻗쳐등 심한 기합을 받은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어떤때에는 복싱을 시킨다며 우리 일행을 싸움을 붙이기도 했고, 나무에 묶어놓고 괴롭힘을 당한적도 있었다 

난 그런이들에의한 살인이라 여겨진다. 물론 처음에는 죽일의도가 없었겠지만 어찌어찌하다보니 죽게되었고, 서둘러 암매장을 하지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아니면 묶어놓고, 또는 무릅을 꿇힌채 하채부분을 흙으로 덮어놓고(실제로 어릴때 이렇게 당해서 거의 초죽음이된적이 있었다), 괴롭히다가 가해자들이 그냥내려가 버리는바람에 사망할수도 있다는생각이다.

절대 자연사란 있을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섯명이 전부 다쳐서 움직일수 없었다면 또 모를까, 그렇지않다면 바로아래 희미하게 민가의 불빛이 보일것이고, 또한 근처에서 거주하던 아이들로서는 그렇게 모여서 자연사할(저체온증으로) 이유가 없다고 본다

와룡산일대는 소위말하는 우범지대였던것이다.

나는 지금도 당시 와룡산에서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기억이 생생하고, 20년이지난 지금도 허벅지에는 그때 와룡산에서 그들이 장난삼아 괴롭히며 도루코칼(하얀색, 연필깍는칼)로 찌른흉터가(채1센티도 안되는길이지만) 남아있다.

아마도 어릴때 와룡산을 드나들어봤던 이들이라면, 현재의 경찰발표나 수사상황에대해 어이없어하고 답답해하며 한숨짓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부디 조금 수고가 되더라도 정확한 사인규명과 더불어 수사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여기까지 익명으로 작성한 한 제보자의 생각 입니다

 

 

과연? 개구리소년들은 누가 죽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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