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사건사고

684부대 실미도 사건 이제야 밝혀진 진실

공포이야기 2022.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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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684부대 실미도 사건은 685부대원들이 무장을 하고 탈영해 인천에서 서울로 진입하여 군인과 경찰과 교전을 벌이다가 자폭한 사건이다 영화 실미도 내용과 실제 실미도 사건과 많이 다르다 영화와 달리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

사건 발생

1971년 8월 23일 인천, 25살 광순 씨는 10개월 된 아기와 함께 버스를 탔다 근데 잘 가던 버스가 멈췄다 여러 명의 군인들이 문을 열고 올라 탔다
군인 한 명은 운전수 머리에 총을 겨눈 상태에서 이렇게 말했다

 

"청와대로가 다른 길로 새면 재미 없어"

 

이 군인들은 684부대원들 이었다

승객들은 혼란에 빠졌고 그렇게 버스는 청와대로 향했다 군인들은 흩어져서 승객들 한 명 한 명 옆에 앉아 감시를 했다

 

당시 버스 승객이였던 광순 씨는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딸이 낯을 안 가려 웃고 있으니 군인들은 얼러주고 그러면서 아기가 귀엽다고 그러고 그런 얘기를 하면서 군인을 보니까 한쪽 바지를 걷고 있었는데 피가 흐르고 있었죠.'


그래서 기저귀 가방에서 기저귀 하나를 꺼내서 묶으라고 하니까 군인은 이내 고맙다 라고 말한뒤 피가 흐르곳을 묵었다

 

그렇게 별일없이 버스는 청와대로 향하고 있었다 한참 달리고 있는데 버스 옆에 경찰 싸이카가 붙더니 차를 세우라고 소리를 쳤다.

 

경찰:차 세워!

 

그랬더니 버스안에 있던 684부대원들은이렇게 말했다

 

군인들:저 놈 쏴 버려!

 

그렇게 달리는 버스에서 달리는 싸이카를 한 방에 쏴 버렸다

버스는 어느덧 대방동 삼거리까지 갔는데 바리게이트가 쳐져 있었고 사방에는 경찰이 매복하고 있고 다들 총을 겨누고 있었다.

흥분한 684부대원들은 총을 발사했고 버스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총 맞은 사람들, 다친 사람들,,,

그때 아기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이거 터지기 전에 얼른 아기 안고 의자 밑으로 숨으세요"

 

남자 손에 있던 건 수류탄이었다

 

684부대원들:전원 안전핀 뽑아!

 

그렇게 684부대원들은 버스안에서 자폭을 했다.

 

 

수류탄이 터지기 전 684부대원 한 명은 애기 엄마에게 쪽지를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 이름은 박기수 입니다 열아홉살에 집을 나왔어요 집에선 제 소식도 몰라요 이 주소로 편지 좀 보내주세요"

[당시 실제 박기수 씨 사진]

 

중학교 졸업사진으로 총격전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소년 같았다
3년전 옥천에서 사라진 건 박기수 뿐만이 아니었다.

 

사라진사람들

무려 7명이 한날한시에 똑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도 옥천에서...

이 7명은 이발소 직원, 양복점 보조, 아이스께끼 장수, 가수 지망생, 옥천 씨름왕 ,헝그리 복서들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어려운 형편의 청년들이었고 처지가 비슷하니까 몰려 다녔다

 

어느 날 아는 사람이 옥천 7명을 불렀다

 

"너희 일자리 구하지? 그러면 너희들 박 부장을 만나봐 박 부장이 일할 사람을 구하고 있는데 월급과 대우가 장난이 아니라는 거야"

 

고민을 하던 7명은 끝내 박 부장을 만나러 대전으로 떠났다

 

"내가 박부장입니다 국가를 위해서 일해 볼 마음 있나? 짧으면 3개월 길면 6개월이다 특수훈련 받고 임무 완수하면 원하는 곳에 취직시켜주지 힘들고 아주 중요한 일인 만큼 특별대우는 반드시 약속한다".

 

이 특별대우는 600불의 월급이었다 당시 환율로 16만원이었다 그때 공무원 월급이 1만원이 조금 넘었다
공무원 연봉을 매달 월급으로 준다는 말이였다

그래서 7명은 도대체 무슨일을 하길래 이렇게까지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건지 궁금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박 부장은 국가기밀이라 말해줄 수 없다고 대답했다

7명은 고민을 하다가 결국 가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가난한 청년들에겐 외면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그 길로 박 부장을 따라나섰다 이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못했다

 

실미도 684부대 창설

대전에서 서울로 가서 다시 인천에 오게 되었는데 도착한 곳이 바닷가였다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에 위치한 실미도 였다

"귀관들은 지금 이 순간부터 명예로운 대한민국 군인이다 오소리 작전에 동참한 걸 환영한다"

오소리작전은 오소리처럼 적을 급습하는 것이였다

무인도에 온 훈련병은 총 31명이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특수요원들이 청와대 기습을 위해 침투한 사건을 1.21 사건이라고 한다
그들의 임무는 박정희 대통령 암살이었다

서울에 침투했던 북한 특수부대 요원이 31명이었다

 

눈 에는 눈 이 에는 이, 박정희는 응징 보복을 명령한다 김일성의 거처 주석궁 습격을 해서 김일성 암살 임무를 명령했다

인원도 북한 김신조 부.대와 똑같이 31명을 맞추고 부대 창설 및 훈련은 1급 기밀로 되었고 중앙정보부와 공군 최고위층만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외딴 무인도에 기지를 만들어 부대원들을 모두 위장 시켰다

 

우리가 실미도에 대해 아는 이야기들 영화는 아주 빙산의 일각이다

 

그 당시 왜 군에서 에이스들을 뽑아서 만드는 게 맞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될수가 없었다

군인 신분이 들통나면 정전협정 위반이 되어 전쟁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어서 민간인을 뽑아서 훈련을 시켰다 민간인은 개인의 일탈행위로 무마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사라져도 흔적이 남지 않은 사람들, 돌아오지 못해도 상관 없는 사람들, 힘없고 가난한 청년들을 대상으로 684부대원들을 뽑았다.

두둑한 봉급, 안정적인 일자리까지 혹할만한 조건 제시로 31명이 실미도에 모였다 영화 실미도에서는 범죄를 저지른 재소자들 위주로 데려왔다고 했지만 그게 아니였다.

그렇게 31명이 모이고 실미도 훈련은 시작되었다

오소리 훈련을 말하자면 매우 혹독했다
행군하다 보면 뒤처지는 훈련병은 무조건 나온다 그래서 빨리 가게 만들려고 교관들이 뒤를 따라가면서 발 뒤꿈치 쪽에 총을 쐈고 통과 지점에도 기관총이 대기 하고 있었다.
제한시간 내 못 오면 총에 맞아 죽었다 안 죽으려면 미친듯이 달려야만 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훈련이었다


어느 날, 완전 군장을 하고 2KM를 왕복 수영 훈련 중 탈진한 한 훈련병이 물에 가라앉아서 그대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었다.

 

그렇게 1년 반이 지난 1969년 10월 고대하던 그날이 오게 되었다.
완전무장하고 폭약 챙겨서 배에 올라타서 오소리 작전을 하려던 순간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작전 취소 대원들은 즉시 실미도로 복귀하라는 명령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이 바뀌 이유는 미국 닉스 대통령은 아시아국가에게 이렇게 선언을 했다

 

"너희 나랏일은 너희가 알아서 해 미국은 빠질게 주한미군도 감축"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 주석궁을 공격했다가 전쟁이라도 나면 감당 불가였다

부대창설 때랑은 분위가 완전히 달라졌다 결국 오소리 작전은 무기한 보류가 되었고 684부대원들은 다시 실미도로 돌아왔는데 봉급이 끊기고 음식 배급도 부실해지고 예전 같지 않았다.


예산은 줄어들지 않고 꾸준히 상승 했었다 돈이 어디론가 새로 있었던 것이다 누가 돈을 계속 착복하는 바람에 684 부대원들의 대우는 매우 나빠질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 약속한 훈련기간은 3개월에서 6개월이였는데 2년이 다 되가고 있었다
휴가, 외출, 면회 모두 없었다 외부와 완전 단절되었는데 심지어 편지도 금지 시켰다


그러면서 실미도 훈련은 계속 되었다

 

어느새 실미도에 고립된 지 3년이 될 무렵 684부대원 31명중 7명이 사망하고 24명만 남게 되었다

어느 날 비극은 소주 한 병으로 시작 되었다 684부대원 1명이 소주를 몰래 숨겨놨었는데 저녁 점호가 끝나고 조금씩 나눠 마시고 있었는데 교육대장한테 걸리는 바람에 전원 집합을 했고 단체로 기합을 받게 된다.

684부대원들은 술 좀 먹은 게 그렇게 큰일이야 라면서 분을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1871년 8월 23일 새벽 6시 목표는 청와대였다 밖에 대기하던 있던 684부대원들은 총과 실탄을 나눠 갖고 각자 위치로 흩어져 시작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섬 여기저기서 총성이 들려오기 시작 했다 이 총격전은 20분만에 끝났다

기간병 18명 부대원 2명이 사망 했다
남은 부대원 22명은 실미도를 빠져나와서 인천에 상륙 했다 무려 3년 4개월 만에...

684부대원들은 지나가던 버스를 붙잡고 청와대로 향했지만 2시간 반 만에 버스에서 자폭을 했다

이 사건으로 684부대원 20명, 기간병 18명, 민간인 6명, 경찰 2명이 사망했다

 

정래혁 국방부 장관은 실미도 사건에 대해 입장 표명을 했다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 공군이 관리 및 수용하던 특수범 24명의 죄수들은 격리 수용에 불만을 품고 난동, 관리 인원을 사살했다.

이후 언론은 군특수범으로 일제히 보도 했다

살아남은 684부대원 4명은 사건을 규명하기 위해 국회 진상조사에 증인으로 출석을 했다

 

"실미도엔 대체 왜 들어간 겁니까? 거기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부대원들의 대답을 뜻밖이었다

 

"비밀 사항이어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국회 진상조사를 앞두고 누가 찾아왔는데 군관계자였다

"이대로 가면 어차피 사형이야 마지막 기회다 같이 월남 가자 대신 누가 묻더라도 보안상 절대 말할 수 없다고 해라 그래야 모두 살 수 있다".

그렇게 국가가 약속을 해서 부대원들은 승낙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에서 수사하고 군사재판까지 모두 계획된 일이였다

결국 부대원 4명은 모두 사형을 받게 된다


35년 뒤에야 실미도 공작원 31명의 명단이 공개가 되었고 그제서야 가족들이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실미도 북파공작원이었다는 걸 가족들이 알게 되었다.

한 목격자의 제보로 35년 만에 매장지를 찾았다 하지만 그곳에 사형수 4명의 유해는 없었다 결국 지금까지도 유해는 찾지 못했다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사건 개요

1,오전 6시 기간 요원 23명중 12명 사살, 6명이 익사를 했고 684부대원 24명중 1명이 사망하고 23명이 집단탈출을 했다.
2,오후 12시10분 인천 남구 옥력동 해안에 상륙을 했다 해안초소 근무자는 이를 발견하고 군에 보고를 했다.
3,오후 12시53분 수인선 동도역 앞 삼거리에서 시내 버스를 탈취.
4,오후12시56분 초소 연락을 받고 대기 중이던 군인들과 총격적.
5,오후 1시 탈취한 버스가 펑크나자 다른 버스 탈취.
6,오후2시23분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서 가로수를 들이 받고 버스가 멈추었고 총격적이 벌어진후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자료출처 달리: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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